역대급 열대야로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을 힘겹게 버티다 보니, 어김없이 세월은 흘러 어느덧 9월이다.

(제공=국립영천호국원) 양귀진 현충과장
(제공=국립영천호국원) 양귀진 현충과장

올해는 추석 명절이 9월 중순이라서, 우리 국립영천호국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위치한 12개 국립묘지에서는 제각기 묘역 제초작업, 각종 시설물 정비 등 추석 성묘객 맞이 준비로 분주하다. 아울러, 국립영천호국원에서는 매년 9월에 특별한 의미의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올해 제74주년을 맞이하는 ‘영천대첩 기념식’ 행사가 그것이다.

영천대첩은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당시 영천전투의 대승을 치하하여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천은 지리적으로 보면 신령, 구산동, 입암으로 이어지는 도로 교차점이며 대구와 경주로 가는 도로망이 발달했고, 철도 중앙선, 대구선, 동해남부선의 분기점으로 대구와는 35km, 경주와는 28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영천이 돌파되면 대구와 경주가 적의 위협을 받게 되며 국군 1, 2군단이 분리되는 동시에 동서간의 보급로가 차단될 수 있는 낙동강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은 ‘포항, 안강, 기계, 다부동, 왜관, 창녕, 마산 등 모두가 이곳 영천만 무사하면 다 무사해진다’고 했을 정도로 영천전투는 국가의 명운을 되살렸던 매우 중요했던 전투였다.

북한군 또한 ‘영천을 점령했을 때 승리할 수 있었고, 이를 상실하자 패배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전쟁국면의 일대 전환점이 된 영천 전투는 6·25전쟁 초기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6·25전쟁 초기 북한은 우리 군에는 단 한 대도 없었던 전차를 앞세우고 남쪽으로 진격을 거듭하였고, 치열한 지연전을 거듭하면서 철수하였던 우리 국군과 UN군은 1950년 8월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방어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전체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중 다부동 방면 돌파에 실패한 북한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낙동강 방어선의 유일한 보급로였던 영천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만약 영천이 함락되면 아군 조직이 분리되어 결과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나아가 부산까지 상실하게 되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는 상황이었다.

제8사단을 주축으로 국군과 미군이 합세하여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5사단을 비롯한 주공부대를 상대로 치열한 공방을 거듭한 끝에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켜 1950년 9월 13일 최종 승리했던 영천전투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고, 9월 16일 국군과 UN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영천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천대첩비가 파리의 개선문 모양의 30미터 높이로 국립영천호국원에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매년 9월 13일 영천대첩 기념식을 거행하여 영천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호국영령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호국의 도시 영천에는 영천전투를 잊지 않기 위한 현충시설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호국원 바로 옆에는 영천전투호국기념관이 있어 영천전투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고, 또한 마현산 권역내에는 후세들이 전쟁 관련 다양한 체험을 통해 나라사랑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가 조성되어 있으며, 영천지구전승비, 충혼탑 등도 함께 위치하여 호국 관광에 대한 시너지 효과를 높이고 있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 가을을 맞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계신 국립영천호국원을 비롯하여 이 지역에 흩어져있는 호국의 유산들을 한번쯤 둘러보며 조국의 소중함을 느껴보는 기회를 가져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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